40개의 차명계좌
당시 은행 서고에는 하루 동안 처리한 전표들이 일자별로 묶여 보관돼 있었다.
지금처럼 거래내역을 전산으로 검색해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과거 전표를 보려면 직접 전표철을 찾아야 했다.
IMF 이후 은행 간 합병도 많았다.
그래서 오래된 전표가 현재 거래은행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은행은 과거 자료를 지방의 별도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거기까지 직접 찾아갔다.
겨울이면 춥고 어두운 창고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전표철을 뒤졌다.
지금 생각하면 참 미련하게 일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찾을 방법이 없었다.
나는 찾으러 간 전표만 보지 않았다
어느 날이었다.
확인하려던 거래의 전표를 하나 찾았다.
예를 들어 그 전표가 1번 창구 직원이 그날 처리한 거래에 들어 있었다고 해보자.
오전 10시.
피상속인 계좌에서 1억 원이 출금됐다.
원래라면 그 1억 원이 어디로 갔는지만 확인하면 된다.
그런데 나는 그 전표 하나만 보고 덮지 않았다.
같은 날의 전표철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봤다.
그러다가 오후 3시쯤 다른 창구에서 처리된 전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1억 원 입금이었다.
계좌 명의는 피상속인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가령 ‘홍길동’이라고 해보자.
그런데 전표를 자세히 보니 이상했다.
비밀번호가 같거나 아주 비슷했다.
‘어?’
그때부터 눈이 달라진다.
홍길동이라는 이름의 전표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또 나왔다.
그 거래를 따라가니 이번에는 홍길순이라는 사람이 등장했다.
또 다른 김 아무개도 나왔다.
이름은 모두 달랐다.
하지만 거래형태와 자금 흐름을 계속 맞춰보니 서로 연결돼 있었다.
한 계좌를 찾으면 또 다른 계좌가 나왔다.
그 계좌를 따라가면 다시 새로운 사람이 등장했다.
돈은 여기저기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그렇게 하나씩 따라갔다.
결국 세 곳의 주거래 은행에서 40개가 넘는 차명계좌를 확인했다.
이제 퍼즐을 맞출 차례였다
40개가 넘는 계좌를 찾았다고 조사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 돈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갔느냐였다.
차명계좌로 분산된 돈이 다시 피상속인이나 가족 명의 계좌로 들어왔는지 확인했다.
가족 명의 부동산이나 다른 자산을 취득하는 데 사용됐는지도 봤다.
사업에서 발생한 돈이 차명계좌로 들어온 것은 아닌지도 확인해야 했다.
수십 개 계좌에 흩어진 자금을 하나씩 연결했다.
말 그대로 거미줄 같았다.
그런데 퍼즐을 하나씩 맞추다 보니 문제가 점점 커졌다.
‘이 정도로 자금을 관리했다면 다른 사업도 그냥 넘어갈 수 없겠는데.’
처음에는 상속세 조사였다.
그런데 이제는 피상속인이 생전에 했던 사업 전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조사가 사업 전체로 번졌다
먼저 부동산임대업을 확인했다.
임차인들을 상대로 실제 임대료가 얼마였는지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신고된 임대료와 실제 받은 임대료가 같은지 보기 위해서였다.
다음은 식자재 공급 법인이었다.
법인의 결산서와 관련 자료를 확보해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가족들의 재산 취득내역도 다시 봤다.
배우자와 자녀가 취득한 재산의 자금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확인했다.
식당과 유흥업소의 신고내역과 실제 사업자도 살펴봤다.
그런데 확인하면 할수록 새로운 문제가 나왔다.
차명계좌와 이른바 ‘바지사장’이 서로 연결됐다.
웨이터나 직원 명의로 사업자등록을 해놓은 곳도 있었다.
일부 사업장은 카드단말기를 다른 명의의 사업장과 연결해 매출을 분산시킨 뒤 폐업시키는 방식도 사용하고 있었다.
하나를 확인하면 또 하나가 나왔다.
처음에는 피상속인의 상속재산을 확인하기 위한 조사였다.
그런데 이제는 부동산임대업, 법인, 식당, 유흥업소, 가족의 재산 취득까지 모두 연결되기 시작했다.
2년 이내 출금액도 문제가 됐다
상속개시 전 2년 이내 출금내역에 대해서도 사용처 소명을 요구했다.
금액이 수십억 원에 달했다.
그런데 제대로 소명되지 않는 부분이 상당했다.
가족 간에 오간 자금도 마찬가지였다.
금융거래를 하나씩 확인해보니 상당 부분이 증여 문제로 연결됐다.
담당 세무사도 처음에는 자료를 준비하며 계속 대응했다.
하지만 조사가 계속 확대되면서 입증하기 어려운 거래가 너무 많아졌다.
결국 중간에 세무사가 바뀌었다.
새로 선임된 세무사가 조사국을 찾아왔다.
“조사관님, 지금 상황을 전체적으로 한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지금까지 확인된 내용을 대략 설명했다.
차명계좌.
가족 간 자금이체.
추정상속재산.
가족 명의 재산 취득자금.
임대료 신고 문제.
법인 문제.
식당과 유흥업소 문제.
설명을 마치고 물었다.
“이 정도면 상황 아시겠죠?”
새로운 세무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것은 조사 결과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정리하고 보니,
세금의 종류부터 내가 했던 상속세 조사 가운데 가장 복잡한 사건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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